231231












마르지 않을 것 같아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소비하며 취하는 이 돈도 

언젠가는 고갈이 될 테고


지금 누리는 것들 중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고 무한하지 않으며


영원할 거라 믿어 입에 섣부르게 올리는 사랑이란 마음도 

언젠가는 바닥을 보겠지만



구월 가을 초입



숨도 못 고르며 엉엉 울며 탔던 비행기 안에서의 나도 나고

그때 런던에 돌아와 정신없이 그었던 허벅지의 흉은 

새삼스러울 만큼 그대로

아물어도 새살이 돋아도 착색은 흔적은 그대로 그늘진 색이지만



여전히 여전히 내 피부고 내 살결이고




변함없이 평생을 떠나며 살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곁에 정착하고 싶은 욕심이 들게끔 만드는 사람들:



수빈 언니와 고양이 계곡 물살과 잘 익은 복숭아


나경이와의 망원 한강, 그 물길과 여름밤

나현이의 배웅 - 쇼디치 어디를 가든 떠오르게 만드는

수림 언니와 무화과, 혹은 침대에 기대 사치에 대해 떠들던 새벽

두꺼비 속 혓바닥: 그 편지, 경희의 손글씨, 

어처구니없이 울려 퍼지던 목탁 소리.

사랑과의 신촌 다방 밀크티와 비비안 웨스트우드

파리에서의 말간 효선, 언니만이 지불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위로




내겐 늘 명예롭고 위대했던 당신의 우울과 자멸

그 속으로 끊임없이 골몰하던 검은 긴 생머리


추락하는 동경을 두 눈으로 관망하고




더없이 다정하고 친절하다 느꼈던 사람의 그림자,그 이면.

그걸 또 가장 가까이서 목도하고



용서를 구하던 편지 두 장

새벽에 껴안은 고백까지도


두 번의 파리, 한 번의 스웨덴, 또 한 번의 베를린

결국 그 무엇도 성취해내지 못했음을 깨닫고는 자기혐오


여전히 포만은 죄책이고

물도 공기도 내겐 전부 남의 것


영혼과 육체의 질량은 비례할지도 모르겠다던 내 유월의 일기

이 말은 오로지 수빈만이 이해하고


주는 사랑은 비대하고 받는 사랑은 볼품없다 느끼다가도

곧장 받는 사랑이 거대하고 주는 사랑이 엉망이라 의심하고


그해 여름 이태원 골목길에서의 기억을 토대로 

나는 이제 비가 좋다 말하지만


여전히 찔끔찔끔 비겁하게 내리는 런던의 빗줄기는 

나를 조금 성가시게 만들고


이 도시에서 나는 익명이기에 편안하지만


동시에 무명이 될까 봐 잔뜩 초조하고


연말, 연초, 새해, 신년


마무리와 시작

축복과 감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공정하게 흐르는 일 초인데

단지 달력의 큰 숫자 하나가 바뀐다는 이유로 

열렬히 환호받는 그 찰나의 기이함

이 모든 어절에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여전히 관여되고 요동치고


모든 게 너무 큰 의미라 숨이 차고 감당할 수 없이 버겁다가도

일분 후면 또 모든 것은 아무 부질이 없고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짜릿하다가도

아무것도 될 수 없어 잿더미가 된 자아

바스라진 나를 덩그러니 관찰하다가


쉴 새 없이 사고하고 경계하고 긴장하고

당연하게 따라붙는 피로 속에 턱을 괴고

내가 주인이 될 수 없는 나의 이 세계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을 버릴 수는 없고


허공 보듯 나를 응시하지만

타인과는 늘 다감하게 눈 맞추고



이런 마음 저런 마음

작년처럼, 재작년처럼, 여느 때처럼

잔뜩 느끼며 켜켜이 쌓인 감정에 발은 빠지고

징그럽게 얽혀 있는 미로 같은 생각 회로에서 길을 잃고

손에 쥔 지도는 땀에 젖어 찢어지고 헤졌지만


그렇기에 그럴싸해 보이려 더더욱 안간힘을 쓰고


귀여운 옷을 걸친 구더기의 내면


그 괴리 속에 나를 잔뜩 혐오하다 지쳐 타인을 사랑하고

그러다 타인으로부터 또 다시 나를 발견하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결코 그 사람을 마음 놓고 미워할 수는 없기에

노래나 틀어두고 자기연민에 젖는 시간만이 이어졌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은 분명히 존재했던



목적지가 어디를 향했던 간에

정신없이 울고 이별하다가도

쉴 틈 없이 사랑하고 연결되었던




이천이십삼년의 마지막 날








안녕히















Threshold
2023-2024
mixed media






















   About 



231231



영원히 동화책을 넘기고 또 그 세계를 동경하고




     이월 며칠  



   공상  











ⓒ 2025 Mouss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