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1.
세상은 너무 징그럽고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이 행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같다가도 금세 부정하고는 한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고단한 터라. 소속감에 얽매이는 사람이고 싶었던 적 없지만, 실은 늘 그래왔다. 존재론적으로 기인되는 불안정이 크고, 그렇기에 나를 설명할 곳을 자주 필요로 했다. 나대로 온전할 수 없다는 건 무수한 대명사를 필요로 하는 일일지도 몰라. 그런데 우습게도 단 한 번도 소속감을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다는 것.
여기서는 이런대로 불안하고, 저기에서는 저런대로 불안하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할 거라는 압박은 나를 숨 가쁘게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노력을 하지도 않는 나의 미동없는 그림자.
그냥 계속 둥둥 부유하기만을 반복할 뿐이야.
내 세계는 왜 이리도 피로하지. 나는 너무 나약하고, 세상은 끈질기다. 그 속에서 자주 극단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건 너무 번거롭고 지친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이야기가 세상에는 너무 많으며, 심지어 계속해서 생성된다. 태어난다.
탄생은 여전히 축복일까?
2.
승은 언니를 만났다. 열 살 차이 나는 내 사촌. 우리는 꼭 친구같다.
가족같지 않다. 피붙이의 절절한 마음같은 건 왠지 어울리지 않다.
가정의 형태에서 나오는 유대감보다는
친구의 의리가 더 어울리는 사이다.
밥 한 끼를 나누어 먹고 밤거리의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서른둘이 된 언니의 인생 이야기.
스물둘이 되어버린 나의 삶 이야기.
나는 스물둘이 되었다기보다는 되어버린 거라고 믿는다.
살아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영부영, 얼렁뚱땅
이 나이가 된 거니까,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퍽 적절하지.
언니는 나더러 뭐가 그렇게 나를 우울하게 만드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고민해보다가 그냥 불안이라고 답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나 우울에 섬세한 사람이 되었는지 잘 모른다.
그치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쨌든 내가 느끼는 모든 마음은 불안이라는 단어와
일맥상통인 것 같아서.
언니는 나한테 스물두 살이 뭐가 그렇게 불안할 게 많냐며 내 팔을 아프지 않게 툭 쳤다. 그러면 나는 또 할 말이 없어진다.
꼭 스물두 살 이주희가 느끼는 불안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처음으로 가족에게 치료를 받고있다고 고백했다.
툭하면 자살부터 떠올린다고도 얘기했다.
작년에 술 처먹고 홧김에 죽으려 했던 이야기도.
그 날 나를 구원해준 친구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했다.
그때 걔가 날 안 구해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자주 상상한다고도.
언니는 내가 언니가 꿈꿔온 청춘의 초상이라고 했다. 유학과 예술.
그래서 내가 너무 멋있다고, 나의 삶과 젊음이 부럽다고 했다.
3.
상심은 거기에 없었다
다만 시시하게 굴었던 나의 태도가 못마땅할 뿐 단숨에 내 세계가 수축된 것을 좀처럼 납득하고 싶지 않을 뿐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의 구절들을 자주 떠올린다
나의 삶의 깊이가 얕아 견딜 수가 없다는
빈약한 인생의 양감을 인정한다는
자살 생존자의 글을 또한 떠올린다
‘다시 한번 잘 죽어봐야지’ 하는 문장에는 종종 공감한다
경희 언니 앞에서 나는 화창한 열아홉
승은 언니 앞에서 나는 근사한 허구
효선 언니 앞에서의 나는 보통의 스물둘
열 명의 사람을 만나면 나는 손쉽게 열 명이 된다
스무 명을 만나면 스무 명의 내가 탄생하고
백 명, 천 명을 만나면 나는 눈 깜짝할 새에 백 명이 되었다가
금세 또 천 명으로 늘어나겠지
천 명의 이주희 중에서 나는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 혼란하다
나는 혼자 있을 때에도 한 명이 아닌 것만 같다 다 가짜 같다
한결같다는 말, 확고하다는 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건 도대체 어떻게 갖는 걸까
내가 갖지 못한 걸 두 손 가득 넘치게 쥔 그 얼굴에서는
내가 안간힘을 쓰고 덤벼들어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빛이 났다
나는 그 사람이 부럽다. 나는 내가 될 수 없는 게 자주 되고 싶다
꿈과 꿈을 말하는 게 맞고 그래서 괴롭다
4.
정말 자꾸만 과거에 살고싶어진다
이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해
scanned sketchbook, 2024
이월 며칠
05:48
ⓒ 2025 Mou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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