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며칠





정신질환은 앓은 이후로,
나는 그게 자주 미웠지만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아무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다들 적절한 연유나 적당한 계기,
그러니까 아직까지 발화된 적 없었을 뿐이야.
게다가 나는 이 병 때문에 아주 오래도록 힘들어하고 있지만
동시에 꽤나 큰 덕택을 보았으니까.


전에 비해 나는 몹시 예민하지만 그만큼 섬세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아주 작은 아름다움도 쉽게 발견하고,
가장 사소한 형태의 상냥함에도 쉽게 감탄하거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영감으로 다가올 때도 분명히 있으며,
더 깊게 사고하고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우울의 원인 혹은 내가 싫은 모종의 이유 같은 것들을
정처 없이 좇다 보면 내면을 관찰할 수밖에 없게 되고,
나에게 집중할 기회가 늘며
그렇게 나의 세계는 확장되어 왔다.


고로 나는 나의 병이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병을 부끄러워한다.



동시에 흥미로워한다.
그들이 나의 질환을 가지고 나를 아주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싫다.
가격표 따위 정도로 평가하는 게 싫다.
내 정신병을 운운하는 게 싫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다뤄지고 소비되는지를 쉽게도 말하는 것이 싫다.
사람들 틈에서 나는 자주 피로와 무망감을 느낀다.


이런 날이면 증오나 혐오로만 가득 찬 글을 한 편 쓰고 싶어.
글보다는 감정 배설물에 가까운 악취 덩어리를.
서문의 첫 자음부터 글의 끝 단락 마지막 온점까지,
모조리 미운 마음만을 욱여넣은 아주 징그러운 글을 쓰고 싶다.


나 너 때문에 진짜 상처받았어. 난 너 믿었는데.
내가 얼마나 너 좋아했는지 알면서.
너가 그따위로 굴지 않았으면 나 이 정도로 밑바닥은 아니었을 걸.
너 때문에 내 가을이 통째로 쓰레기 같았어, 하는 얘기들.



혹은 너 그거 애정 아니었어.
내가 받아본 마음의 형태 중에 너 거가 가장 가학적이며 폭력적이었다.
그따위 걸 사랑이라고 에둘러 포장하는 네 모습 때문에
나는 종종 구차해졌어.
이게 내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면 어떻게 하지,
쓸데없는 고민에 시간 낭비 무지하게 했다고 – 하는 것들.


증오건 혐오건 욕설이건 배설이건 폭력이건,
그런 것들은 내게도 쉽다.
막말로 그걸 누가 못 해.


그건 우스울 만큼이나 아무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걸.



시시각각
매 분 매 초마다 바뀌는 마음의 표정들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러지 않는 건 내 신념 같은 거야.
다정할 수 있을 때에만 다정하고 싶지 않아.
바쁘고 정신없고 삭막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까지도
나는 친절하고 싶은 거야.
내가 애정하는 영혼들에게 늘 상냥하게 굴고 싶다.
오롯이 귀한 마음만을 건네주고 싶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면
사랑 따위가 무슨 힘이 있나 하고
자꾸만 자조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사랑 따위가 뭘 할 수 있어.
그까짓 건 조금의 돈도 안 되잖아.
아주 작고 연약한 마음이라 쉽게 부서지고 사라지는 걸.
그건 있다가도 없는 허상 같은 거야.
현대 사회의 신기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러므로 나는 이런 마음과 자주 싸워야 한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없지 않냐는 의문과.
그 어떤 것도 실은 조금의 부질도 소용도 없다는 그 사실과.


내게 상처 주었던 그 누구도 그래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상처 주었던 누구들도 제발 행복했으면 좋겠고.
나는 그 사람이 없는 내 삶에서, 그 사람은 내가 없는 그의 삶에서.
모두가 각자의 세계에서 안온하고 건강하길 바라.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거짓말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혹은 내가 아주 착한 사람이라 믿는다.
이따위 게 착한 거라면, 그래도 아직 내가 악한 축에 속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착하게 굴었으면 좋겠다.
나도 사람들에게 더 착한 사람이고 싶다.


























비밀의 화원 


이월 며칠  


    공상  


   05:48  


날 구원해준 친구에게






ⓒ 2025 Moussy
All rights reserved.